전주한동교회 김동하 목사
전주한동교회 김동하 목사가 전북경 찰청 교경협의회장으로 선출되며 지
난 6년간 사실상 중단됐던 경목회의 사역은 새 전환점을 맞았다.
김 목사는 취임 소감을 통해 “그동안 멈춰 있던 경목회가 경찰 선교와 지
원, 협력을 위해 다시 깨어나게 돼 감사하다”라며 “총회를 통해 회장직을 맡
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혔다.
그는 “경목의 가장 큰 역할은 경찰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 이라
며 “경찰서장과 간부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지역 현안을 함께 논의하
고, 기도하며 소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전북경찰청 교경협의회장에 추대된 김동하 목사는 경찰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에 충실히 임하겠다고 밝혔다.
경목회의 실질적인 사역 방향도 제시 했다. 경찰들의 정신적·윤리적 가치
함양을 위한 교육에 힘쓰고, 애경사와 종교 행사 지원, 위기 상황에 처한 경
찰들에 대한 돌봄과 후원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또한 유치장 사역과 불우 청소년 지원을 병행하며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
도 이어갈 예정이다.
경찰서 내 신우회 사역도 중요한 축이다. 김 목사는 “각 경찰서에는 신우회
조직이 있다”라며 “매월 모임 때 예배를 인도하고, 경찰과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경목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김동하 목사의 목회 철학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하다. 그는 “성도들에게 거룩
을 강조하고 성경적인 믿음을 갖도록 가르친다”라며 “주님의 마음을 닮은
따뜻한 성도가 되기를 늘 권면 해 왔다”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자신을 “야망이 없는 목 회자”라며, 교회 성장이나 외형적 부흥
을 목표로 삼기보다 ‘행복한 목회’를 지향해 왔다고 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전도를 강요한 적도, 교회 부흥을 주제로 설교한 적도 없
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자는 권면이 전부였습니
다.”라며 교회 건축을 위한 작정헌금이나 특별 헌금을 진행하지 않았고, 주
일성수와 기본적인 교회 생활에 충실할 것을 강조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김 목사의 목회 여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호남교회를 섬
기던 중 계획 없이 교회 개척의 길로 들어섰다. 호성동 상가 2층에서 시작
된 개척은 IMF 외환위기 시기와 맞물렸다. 당시 대출 이자가 17.5%에 이
를 만큼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외부 후원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께서 모든 이자를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
다. 신기할 정도로 범사에 형통함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어려운 형
편 속에서도 다른 교회를 돕는 공동체로 서게 됐다.
이후 2005년, 현재의 평화동 예배당을 건축해 이전했고, 그곳에서 20년의
세월을 묵묵히 걸어왔다. 김 목사는 교회 개척과 관련 독특한 원칙을 강조
했다. “아무리 교회가 어려워도 목회자에게 사례비는 지급해야 한다”며 “목
회자도 설령 10만 원 이라도 사례비를 받았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헌금해
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그는 ‘심는 법칙’이라 불렀다. 성도는 목회자를 섬기고, 목회자는 하나
님 앞에 예물을 드림으로써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며, 이 과정에서 교회와 목회자 모두
가 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가 청소년 사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는 평화동 이전 이후였
다. 지역 내 불우 청소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는 이들을 모아 성
경공부와 영어 교육, 악기 연주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한동문화예술단’이다. 하나님은 음악과 교육 분야에
재능 있는 교사들을 붙여주셨고, 아이들은 연주자로 성장했고 필리핀 빈민
촌과 태국에서 전도 연주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그 아이들이 자라 결혼하고, 지금은 한동교회를 섬기는 성도
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진안군 동향면 학설리에서 태어난 직후 전주로 이주한 그는,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전국을 오가며 성장했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정은
큰 어려움을 겪었고, 중학교 시절에 전주에 정착하게 됐다.
그의 신앙 여정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 문턱을 넘으며 시작됐다. 그러나 그
이전, 가족의 영적 전환점은 뜻밖에도 할머니의 임종을 앞둔 순간에 찾아왔
다. 무속신앙과 불교에 익숙했던 할머니는 위중한 상태에서 잠시 의식을 회
복하며 “우리 집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할머니
는 집 안에 귀신들이 가득한 환상을 보았고, 그 이유를 묻자 “예수를 믿는
집에는 갈 수 없어 이곳에 머문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 경험 이후 가족들은 성당을 찾았고, 할머니는 영세를 받은 뒤 소천했다.
온 가족이 영세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계기였다. 이후 어머니는 부흥회
를 통해 복음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다. 엄신영 목사의 집회에서 받은 영적
각성이 어머니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전주순복음교회와 전주
동부교회에 서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어머니 김영숙 집사는 매년 서리집사 임명장을 소중히 간직할 만큼 교회를
사랑했고, 훗날 권사로 임직하며 기도의 사람으로 가정을 지켰다. 부친의
이른 소천 이후 홀로 네 형제를 키우며 기도는 삶의 중심이었다.
김 목사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 호남교회에 출석하며 당시 전도사였던 김
선기 목사 설교를 듣고 ‘귀가 열리는’ 경험을 했다. 그는 학생회 조직, 주일
학교 교사, 청년회 창립 등 교회 전반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금요철야까지
참여하며 신앙 열정을 쏟았다.
주변 성도들이 그에게 신학을 권했지만 처음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
만 전북대 3학년 때 지도교수가 “성직자가 잘 어울릴 사람”이라며 신학을
권면했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이 권면이 그의 마
음에 깊이 남아 결국 김선기 목사와 상담하고 신학의 길로 향했다.
김선기 목사는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그에게 다음세대 사역을 맡겼다. 그
는 교회에서 어린이·중고등부·청년 교육을 담당하며 교육사역을 펼쳤다.
이후 안양성결신학대학원에 편입해 졸업했고, 성결교 신학대학원이 전주
에 설립되자 교무과장으로 학 양성에도 힘을 보탰다.
그리고 1996년, 마침내 교회를 개척했다. 사역의 여정에는 아내 손수경 사
모의 헌신이 함께했다. 손 사모는 한동문화예술단 설립 초기부터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바이올린과 첼로 등 다양한
악기를 직접 배우며 자녀들과 아이들을 지도했고, 그 헌신이 오늘의 문화
예술 사역으로 이어졌다.
그는 “사모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지혜 게 감당해 왔다”라며 감사를
전했다.
경찰 선교, 지역사회 섬김,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헌신으로, 김동하 목사
는 묵묵히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며 오늘도 사역의 열매를 맺고 있다.
/임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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